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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뉴스 “연구하다가 힘들면 버스 잘못타고 에버랜드 한 번 다녀오세요”

관리자 2023년 09월 01일 10:36 조회 168

근로지원인에게 캡처해서 보내줬던 당시 위치. 에버랜드로를 향해 가고 있다.  ©박관찬
근로지원인에게 캡처해서 보내줬던 당시 위치. 에버랜드로를 향해 가고 있다.  ©박관찬

내가 탄 버스가 서울을 벗어났다는 사실 정도는 이제 나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평일 오전 8시가 넘은 시간이면 출근시간대라 차가 막힐 게 뻔한데, 버스가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지금 버스가 달리는 도로는 서울이 아니다.

잠시 고민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님한테 가서 버스를 잘못 탔으니 내리게 해달라고 할까?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는 분명 고속도로를 연상시키는 풍경이었다. 지금 당장 내린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가장 먼저 근로지원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버스를 잘못 탔다고. 그리고 회사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오전에 예정된 회의에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연구팀 동료들은 나만큼이나 다들 놀랐겠지만 회의는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회사로 오라고 날 안심시켜 주었다.

이제, 작전을 짜야 한다. 어쩌면 재난일지도 모르는 현 상황에서 어떻게 슬기롭게 빠져나올 수 있을지에 대한 작전 말이다. 시청각장애가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과 의사소통이 쉽지 않고 낯선 곳에서는 혼자 길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이전에도 몇 번씩 겪었던 이런 상황들이 내게는 재난과 다름없었다.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늘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날만큼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그리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이전에 많이 경험해서 그런 건 아니다. 재난일지도 모를 그 상황에서 날 구조(?)해줄 든든한 근로지원인의 존재 덕분이다. 아직 석 달도 채 함께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함께하면서 내가 봐온 근로지원인은 충분히 그 상황에서 나를 구조해줄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근로지원인의 존재는 역시 내겐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 같은 영웅이 부럽지 않았다. 버스를 잘못 탔다는 ‘사실’만 메시지로 알렸는데, 그 메시지를 보낼 당시 근로지원인은 막 회사로 가는 ‘진짜’ 셔틀버스를 타려는 찰나였다. 내 메시지를 확인한 근로지원인은 버스를 타지 않고 바로 ‘구조 작업’에 들어갔다.

근로지원인은 우선 내게 스마트폰에서 어떤 어플로든 지도 앱을 켜서 현재 위치를 캡처해서 보내달라고 했고, 회사에 전화해서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내가 있는 위치를 확인한 후 모시러 가서 회사로 같이 출근하겠다고 했단다. 내가 미처 ‘이렇게 지원해 주세요’라고 요청할 틈도 없이, 근로지원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있는(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오려는 것이다.

내가 지도 앱에서 현재 위치를 캡처해서 근로지원인에게 전송했는데, 근로지원인이 확인한 내 위치는 ‘분당’이었다. 정말 서울을 벗어난 거다. 일단 근로지원인도 분당으로 가는 지하철을 탄다고 했다. 아직 그 상황이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사실 그 순간 근로지원인에게 너무 고마웠다.


근로지원인에게 캡처해서 보내줬던 당시 위치. 에버랜드로를 향해 가고 있다.  ©박관찬
근로지원인이 온다고 하니까 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캡처했을 때의 위치가 분당이더라도 버스는 계속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파악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근로지원인에게 부탁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분에게 전화를 걸어줄 테니까 통화해서 버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확인해 달라고. 근로지원인이 그러겠다고 해서 난 몸을 일으켜 뒷좌석에 앉아 있는 분에게 말했다.

“저 제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데, 제 지인과 통화 좀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난데없이 앞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몸을 돌려 말을 걸어오니 버즈를 귀에 꽂고 음악을 듣고 있던 그분은 엉거주춤하며 자기 폰을 꺼냈다. 난 내 폰으로 통화하면 된다고 얘기한 뒤, 근로지원인에게 통화가 연결되도록 하여 내 폰을 뒷좌석의 분에게 잠시 맡겼다.

통화를 끝내고 폰을 넘겨 받았는데, 곧 전송되어온 근로지원인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그 버스 에버랜드로 가는 거래요!”

세상에나, 어린 시절 정말 가고 싶어했던 에버랜드를 이렇게 가게 되다니! 참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가서 자유이용권을 손목에 두르고 마음껏 놀이기구를 탈 상황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근로지원인도 에버랜드로 온다는 메시지를 확인한 후, 난 비로소 버스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그리고 긴 숨을 내뱉었다.

만약 근로지원인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지도 어플을 켠다고 해도 내 저시력으로는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버스 목적지를 확인하기 위해 누군가와 의사소통을 시도했다고 해도 원활하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내게 하려는 말을 본인 폰에 적을 텐데, 거기 적힌 ‘작은’ 글씨는 내가 읽기 힘들 확률이 99%다. 음성인식기능 어플을 활용할 수도 있지만 목적지 등 정확한 정보가 중요한 대화니까 그 상황에서 활용하기 조심스럽다.

그래서일까? 에버랜드 근처 카페에서 넋을 놓고 아무 생각없이 시간만 흘러 보내고 있던 나를 구조하러 나타난 근로지원인이 그렇게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내가 왜 에버랜드로 가는 버스를 탔는지 이유를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근로지원인 덕분에 에버랜드에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그날 다시 한 번 느꼈다. 근로지원인만큼은 너무 좋은 사람으로 만났다고.

그날 일 덕분에 연구팀 동료들이 회의하다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생겼다.

“연구하다가 힘들면 버스 잘못타고 에버랜드 한 번 다녀오세요.”

출처 : 에이블뉴스(https://www.ablenews.co.kr)